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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경주 양동마을(慶州 良洞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양반 집성촌으로 1984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 34차 회의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협약 선포 40주년 기념 세계 최고의 모범 유산(The Best Model Case)로 선정되었다. > >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크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조선시대 양반 씨족마을로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재상이며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을 배출한 6대 국반(國班) 여주이씨(광산 김씨, 반남 박씨, 은진 송씨, 덕수 이씨, 진보 이씨가 6대 국반)와,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 손중돈 선생을 배출한 명문 도반(道班) 경주손씨 양성이 서로 협동하고 경쟁하며 600여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영남 남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문과 31명 포함 과거 급제자가 총 116명에 달했으며, 이밖에도 수많은 학자와 충절대의 명장,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면서 그 명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 >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기와집의 수는 전국 최다로 이를 포함하여 국보 1점, 보물 4점, 국가민속문화재 12점, 경상북도지정문화재 8점 등 도합 25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 > 한국에는 7개소의 국가 지정 전통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역사와 규모 및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및 가치, 그리고 뛰어난 건축과 조경양식,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의 면에서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의 가치 > 양동마을은 한국인 지배계급 양반의 삶의 공간의 원형과 정신유산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을 높이 평가받았다. > > 첫째, 양동마을은 한국의 씨족마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전형 중 하나인 처가입향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 > 둘째, 양동마을은 전형 중 하나인 산기슭 입지의 대표적이고 우수한 사례이다. > > 셋째, 양동마을은 생산영역, 생활영역, 의식영역으로 구성되는 한국 씨족마을의 전통적인 공간구성을 기능적이고 경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 > 넷째, 양동마을은 조선시대의 가장 시기가 이르고 뛰어난 살림집, 정사, 정자, 서원 등의 건축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 > 다섯째,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적, 문화적 성과물인 고문헌과 예술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와 특징적인 무형의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사례이다.[1] > > 지리 및 환경 > 경주시 시내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다. > > 이 마을은 씨족마을의 대표적 사례인데, 씨족마을은 성씨를 매개로 하는 부계의 혈연집단이 대를 이어 한 곳에 정착해 이뤄진 정주 형태다. 조선 전기 이후 재산과 제사의 장자 상속이 강화되면서 나타나게 된다. 하나 혹은 두 성씨의 양반이 마을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가지는데 벼농사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는다. 양동마을은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한 가지 전형, 즉 혼인으로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 자리를 잡는 처가입향의 경우다. > > 양동마을은 풍수의 길지에 입지했다.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여럿 나란히 있는 ‘勿(물)’자 형의 형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을은 조선시대 유명한 지리지인 택리지에서 길지로 언급됐으며 조선의 풍수에서‘삼남의 사대길지’에 포함됐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일예로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血자가 된다하여 일제가 계획한 마을 안으로의 철도통과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앉혔다. > >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마을의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에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고, 고가들도 접근해야만 볼 수 있다. > > 양동마을의 가옥과 건물들은 이와 같은 지형에 잘 조화돼 자연과 일체화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지형의 경사에 기대어 집의 자리를 잡고, 집에서 바라보이는 조망점을 풍수의 원칙에 따라 조정한 결과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과 집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 산새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 > > 형성사 > 양동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다. 그러나 한편 청동기 시대 묘제의 하나인 석관묘가 마을의 안산인 성주산 정상 구릉지의 100여기가 정도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고고학자들의 보고로 보아 기원전 4세기부터 사람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 > 또 이웃 마을 안계리에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또 일본인 역사 학자인 善生助永氏의 자료와 1970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안계리 고분군(安溪里古墳群) 발굴 자료에 의하면 현재 마을의 주민생활은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고려에서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오씨(吳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가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다. > > 경북 지방 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고,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올랐다. > >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 > 양동민속마을이 외손마을이라가를 따라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풍덕 류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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